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집트 신왕국 (문단 편집) === 제19왕조 === [[람세스 1세]]는 고귀한 귀족 출신이었던 것은 맞았지만 본디 왕실 혈통이 아니었기에 파라오에 오를 것을 예측하고 있지 못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군 장교였으며 삼촌은 쿠시 총독의 딸과 결혼하는 등 파라오 즉위 이전에도 매우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군대 출신인 호렘헤브가 왕위에 오르며 군에 복무하던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궁정으로 끌어가면서 군직에 있던 람세스 1세도 바로 최고위 관직에 올랐다. 람세스 1세는 호렘헤브의 재위 동안 [[세트(이집트 신화)|세트]]의 대신관직을 맡으며 아텐 신앙을 밀어내고 다시 이집트의 전통적인 종교관을 부활시키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선대 파라오 호렘헤브는 아케나텐 시절의 혼란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을 이미 만들어 놓았기에 덜컥 왕위에 오른 람세스 1세는 예상 외로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람세스 1세의 즉위명은 '멘페티레', 즉 '[[라(이집트 신화)|라]]의 힘이 세운 자'였으며 출생명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라는 의미의 '람세스'였다.[* 이집트어로는 정확히 '라 메스 시스'인데, 이 이름이 그리스를 거쳐 들어오며 그리스식인 '람세스'로 불리게 된 것.] 람세스 1세는 왕위에 오른 후 약 1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그에 관련된 대규모 문화유적도 없다. 람세스 1세가 죽자 아들 [[세티 1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등극했다. 당시 세티 1세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한창 힘을 키우고 있던 [[히타이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에서는 워낙 아텐 신앙을 폐지하고 옛 종교로 회귀하는 일이 더 급했기에 국경 밖의 히타이트를 신경 쓸 틈이 없었고, 때문에 히타이트는 세티 1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이미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대단한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세티 1세는 과감하게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고, 재위 10년 째 되는 해부터 여러 차례 히타이트와 전투를 치렀다. 세티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며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가 잃어버렸던 영토 상당수를 되찾았다. 세티 1세가 남긴 최고의 외교적 유산은 [[시리아]] 지방의 고대 도시 카데시를 함락시켰던 것. 이는 호렘헤브나 람세스 1세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 세티 1세가 카데시를 정복할 무렵 그의 곁에는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람세스 2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 곳에 아버지를 기리는 승전비를 세웠으나, 카데시가 워낙 히타이트의 본거지와 가까웠기에 이집트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카데시를 히타이트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카르나크 신전이나 타 신전들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세티 1세는 몸을 가리지 않고 친히 전장에서 칼을 휘둘렀다고 전해지며, 히타이트 뿐만 아니라 [[누비아]], [[리비아]]의 유목민들[* 리비아 지방의 유목민들은 점차 이집트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과도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군사적으로 이집트의 옛 강역을 회복한 세티 1세는 동시대 이집트인들에게 크나큰 존경을 받았고, 현대의 고고학자들 역시 세티 1세가 후계자 [[람세스 2세]]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다고 평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